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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을 떠나 대한의 무장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인물 4인

똥베이런 2017.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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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 제국 덴노 직할의 조선총독부가 한반도를 강제 점령하여 불법적으로 통치하였습니다. 이에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단체들 및 무장단체들은 일제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만주지역 일대로 넘어가서 무장단체 및 세력을 구축함했습니다.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대한민국의 무장독립군들은 게릴라 전을 통한 무장항쟁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3.1운동의 영향으로 인하여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함에 따라 상해 임시정부 직속의 무장부대를 보유하기도 하였는데요. 시대가 시대인 만큼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과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홍범도 장군


평양 출신으로 1905년 대한제국의 을사조약 체결을 시점으로 함경도 갑산 일대의 포수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항하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진행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 시기에 홍범도 장군은 일본 헌병대를 포함하여 일본 육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약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사회주의 인사는 아니었지만 러시아로 이동하면서 일제의 연해주 지역의 독립군들을 소탕하려고 하자 이 때 연해주 소재의 독립무장단체들과 인연이 되어버렸다고 하는데요. 이후 홍범도 장군은 함경북도를 수 차례 진출하면서 1919년 10월 혜산진 일대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유격전을 펼치면서 지명도를 높였다고 합니다. 1920년에는 봉오동 일대에서 무장독립운동단체가 연합하여 대한 북로군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으로 선출되었는데요. 이후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를 치루고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하여 활약하였다고 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1945년 광복 2년전인 1943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1962년 10월 25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고 합니다.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은 1918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광복회 부사령관을 역임하고 대한 광복회 해산 이후 북간도 지역으로 넘어가서 북로 군정서군을 지휘하였다고 합니다. 1920년에는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 연합부대를 지휘하였으며 1920년대 중,후반 북만주 일대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한 지휘관이라고 합니다. 김좌진 장군은 자유시 참변으로 반공노선으로 전향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자유시 참변 이후에는 만주에서 생활하면서 만주지역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김좌진 장군은 자유시 참변 이후 반공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당하였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일제에 대항하는 무장독립부대를 이끌며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의심없이 위대한 독립군 지휘관으로써 손색이 없다고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범석 장군


이범석 장군은 한국 무장독립전쟁사의 양거두로 묘사되고 있는 인물이며 한국 국군 초대 국방부장관이라고 합니다. 이범석 장군은 1907년에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집안의 머슴 출신의 대한제국 군인이 일제가 강요한 군대해산에 저항하다가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항일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이범석 장군은 만주로 떠난 후 독립군벌들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자들 간의 세력 투쟁이 벌어지자 이범석 장군은 민족주의자 진영에 참여하였다고 하는데요. 이범석 장군은 더 이상 사회주의자들을 상대 할 수가 없게 되자 지청천 장군과 함께 만주를 떠나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 세력과 합류했다고 합니다. 이범석 장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 결성되자 지청천 장군과 함께 창군에 참여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범석 장군은 1941년에는 대한 광복군 중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사령부 참모장이 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범석 장군의 경우에는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측근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이승만에게 잘 보인 덕분에 초대 국무총리도 역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범석 장군은 한반도 독립 이후 괜찮은 길을 선택했더라면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지청천 장군


지청천 장군은 본명은 지대형으로 독립 운동으로 도망을 자주 다니다 보니 상당히 많은 이름을 사용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고 합니다. 지청천 장군은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간 이유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졸업했다고 하는데요. 지청천 장군은 일제에 맞설 능력을 키우기 위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실제 지청천 장군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탈영하여 만주로 넘어가서 한 평생을 독립군으로 활동한 인물인데요. 지청천 장군이 중국 본토에서 활동 당시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지만 좌익 성향이 강한 김원봉과 우익 성향의 그는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이후 지청천 장군은 김구의 한국독립당에 입당하게 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민주국민당 최고의원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지청천 장군은 한반도의 독립을 본 후 1957년 1월 15일에 급서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의 나이 68세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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