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10가지 이유
1592년 일본에서 가장 강력했던 다이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이묘들을 연합하여 명나라를 침공할테니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를 조선에게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도요토미 정권에 '정명가도' 거부 의사를 밝혔고 왜군은 결국 조선을 침범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이 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본국인 일본으로 철수하면서 전쟁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 되었다.
수도 한양으로의 무조건 진격
임진왜란 초기에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무작정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선조를 잡기 위해 한양으로 진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왜군이 한양에 이르러 백성들을 버리고 평양으로 도망가게 되버리죠. 이 것으로 인해 왜군은 멘탈이 터졌고 한양에서 장기간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군에게 시간을 준 것입니다.
호남 진격에 대한 지속적인 실패
왜군은 한양을 점령한 이후 점령하지 못한 지역 중 호남을 점령하기 위해 병력을 호남으로 보내게 되는데요. 조선 정규군과 호남 의병들의 연합으로 호남 진격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돌아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진주대첩 역시 왜군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진격하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한 것입니다. 하지만 진주성에서 막히면서 호남 점령에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광해군 분조의 의병 독려
의주로 도망가버린 선조는 광해군에게 분조를 이끌라고 명을 하였고 광해군은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에게 의병 독려를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실제 당시 왕세자였던 광해군은 직접 백성들을 만나고 독려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광해군 분조의 의병장에 대한 정규군 관직 하사
광해군 분조는 임진왜란 중기에 들어 빛을 바라기 시작하는데 광해군 분조에서는 의병장들에 대한 정규군 관직을 하사하게 됩니다. 조선 조정에서 의병들을 정규군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되면서 의병들과 조선 관군들의 사기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의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병사들의 사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 수군의 전략전 전술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을 중심으로 연합함대를 구축하여 해상 전투를 벌였다고 열려져 있습니다. 조선 수군은 대규모의 함대를 보유하고도 전략적 전술을 사용하면서 왜군함대를 상대하였고 이로 인해 부상자, 사망자들이 없이 큰 승리를 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화포에 대한 판단 오류
임진왜란에서 왜군 지휘관들은 세키부네라는 빠른 배를 이용하여 상대의 배에 올라가서 전투를 벌이는 형식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의 주력함선인 판옥선은 세키부네보다 크고 화포 장착이 가능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임진왜란1592에서 보셨다시피 화포 장착의 시간을 벌기 위해 배를 돌리면서 화포를 발포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조선 수군의 전략적 승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강화협정 3년 간 조명연합군의 재정비
명나라와 왜나라의 3년간의 강화협상으로 인해 조선의 정규군은 20만 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군대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선조는 대규모로 성장해버린 조선군을 보고 위협을 받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3년 간 조선군은 호남일대를 중심으로 재편성을 한 것은 왜군에게 치명타를 날리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군 병사들의 향수병 및 보급문제
왜군은 한반도를 침공하였는데 어찌보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입장에서 외국입니다. 현재도 현대인들은 타국에 가면 향수병에 걸리기도 하는데요. 7년 간이나 조선에서 생활했던 왜군 병사들은 향수병에도 고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조선 수군이 남해안을 장악하면서 왜국 본토에서 들어오는 보급품을 모두 차단당했기 때문에 제일 심각했던 보급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라는 단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했다는 뜻은 무력으로 다이묘들을 굴복시켰다는 뜻인데요. 임진왜란 당시에 2인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왜국 본토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정유재란에서 히데요시가 사망 이후 왜군은 전부 일본 본토로 철수를 하였죠.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도망자 선조에 대한 집착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왜군이 제일 병크를 터트린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군의 지휘관들은 선조만 잡으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가토 기요마사는 선조의 아들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하기도 하였는데요. 왜군이 선조를 잡기 위해 눈이 뒤집혀져 있었던 기간 동안 조선군은 하삼도(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반격을 하려고 기틀을 닦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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