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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문 출신 한인2세대, 미국의 전쟁영웅

똥베이런 2017.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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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 UN국제연합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



故김영옥 대령

(1919년 1월 28일 ~ 2005년 12월 29일)


김영옥 대령은 한인2세대로 미국의 전쟁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다. 故김영옥 대령의 아버지는 1910년 경술국치 당시 미국으로 이민을 선택했고 미국에서 편의점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故김영옥 대령은 어린시절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생활고는 겪었다고 한다. 생활고를 겪은 이유는 故김영옥 대령의 아버지가 편의점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영옥 대령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로스앤젤레스 사립 대학에 입학했지만 1년 뒤 자퇴를 했다고 한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 육군 모병소에 입영신청을 했으나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후 1941년에 법이 바뀌면서 아시아계도 징집 대상에 들어가 육군 병으로 입대한다.



김영옥 대령은 사관학교 후보생으로 선발되어 장교로 임관했고 일본계로 분류되면서 하와이 출신의 일본계 2세대로 이루어진 미 육군 442보병연대 100보병대대(442nd Infantry Regiment, 100th Infantry Battalion)에 배치되어 소대장을 맡았다. 사실 김영옥 대령이 소대장으로 부임한 부대는 미군 행정명령 9066호에 의거해 인질 같은 개념으로 창설된 부대라고 한다.



이후 김영옥 대령은 미 육군 제5야전군에 배속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다. 특히 참전 용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100대대 장병 전원이 자신들이 미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어해서 싸우고 싶어했다고 한다. 100대대의 부대 모토가 "Go For Broke"이었다고 하는데 퍼플하트 대대라고 불릴 정도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했다.



특히 2차세계대전 당시 김영옥 대령의 부대의 유명한 일화로는 프랑스 비퐁텐느(Biffontaine)에서 김영옥 소대장이 수류탄을 들고 독일 육군의 기관총 진지에 돌격하다 총을 맞았다고 한다. 총을 맞은 것을 목격한 소대원 전원이 "반자이(돌격)~! 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기관총 진지를 박살내고 독일군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미 육군에서도 유명한 레전드 사건이라고 한다.



특히 미 육군이 로마를 점령 한 후 미군 사령관이 로마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미군 사령관이 김영옥 대령을 본 뒤 계급이 고작 중위라는데 놀라서 왜 겨우 중위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김영옥 대령은 "진급 신청을 5번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사령관은 당장 옆에 있는 전속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다가 붙여주면서 그 자리에서 진급시켰다.



김영옥 대령을 즉석에서 진급시킨 인물이 바로 미 육군 중장 마크 클라크 장군이라고 한다. 마크 클라크 장군은 한국전쟁 종전 당시 유엔국제연합군 최고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이후 김영옥 대령은 남프랑스 전선에도 참전했으나 비퐁텐느에서 총상을 입고 후방으로 이송되어 로스엔젤레스에서 휴양 생활을 했다. 



이후 김영옥 대령은 총상이 회복되자 유럽 전선으로 다시 되돌아가려고 했으나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전선이 종료되었다. 현재까지도 비퐁텐느에 있는 교회 벽에는 김영옥 대령과 100대대 용사들을 기리는 명패가 걸려있다고 한다. 유럽 전선에서 김영옥 대령의 활약 덕분에 이후 미 육군이 다시 쓰일 정도였다고 한다.



김영옥 대령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전역을 하고 세탁소를 열고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세탁소가 미국에 흔치않았던 코인세탁소 방식이라 상당히 수익도 잘 나왔고 경제적으로 나쁘지 않게 생활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인해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예비역 소집 형식으로 김영옥 대령은 미 육군에 재입대를 하고 한반도 전선에 도착한다. 김영옥 대령의 자서전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한국에 도착했을 때가 한반도 땅을 처음 밞아보는 것이라고 했다.



김영옥 대령은 1951년 4월 미 육군 제7보병사단 31보병연대 정보참모로 임명되었고 김영옥 대령의 활약으로 인해 미 육군 제7보병사단 제31보병연대가 연전연승을 거두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1951년 10월에는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미 육군 제7보병사단 31보병연대 1대대장이 되었다고 한다. 김영옥 대령은 미 육군 최초로 아시아계 보병 대대장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의 레전드 이야기가 하나 있다고 한다. 1951년 6월에 김영옥 대령은 미군의 오인 포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은 뒤 8월 27일에 복귀한다고 한다. 김영옥 대령이 오인폭격을 받은 이유가 1개 보병대대로 전선을 돌파하여 겨우 20일 만에 60km나 북진해 현재의 휴전선 형태를 만들어 냈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미군은 아군을 적군으로 오인하여 포격을 했다는 것이다.



김영옥 대령은 1952년 가을에 미국으로 귀국했다. 특히 김영옥 대령은 미 육군 내부에서도 유명한 화력덕후로 통한다고 한다.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직접 포병 화력유도를 할 정도로 독도법은 거희 마스터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미 육군의 화력지원은 김영옥 대령이 지휘했던 부대들은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내내 훌륭한 전과를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영옥 대령은 한국전쟁 종료 이후 1972년까지 미 육군에 있었고 최종계급은 대령이다. 김영옥 대령은 1972년까지 미 육군보병학교 교관, 독일 주둔 육군 대대장,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등을 역임했다.



김영옥 대령은 최종계급 대령으로 전역하였고 전역 이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면서 여러가지 사회봉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등을 만드는데 공헌했다고 한다. 특히 김영옥 대령은 고아원을 후원하기도 했으며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의 조사위원회에도 참가했고 위안부 문제에도 활약했다.



생전에 김영옥 대령과 절친한 사이었던 1948년, 1952년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 리스트 새미 리(Sammy Lee, 1920. 8. 1 ~ 2016. 12. 2)은 故김영옥 대령 장례식에서 독립운동가 아들인 고인과 나는 5살 때부터 희노애락을 같이했다며, 지난 가을 시더스 사이나이 병원에서 만났던 모습이 마지막이라고 하니 눈물을 앞을 가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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