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은 왜 참전했을까?

똥베이런 2017.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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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지원군(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로 중국의 정규군인 인민해방군과는 약간 성격이 다른 부대라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 UN연합군과 미군의 참전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멸망 당 할 위기에 처하자 우방국인 중국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었던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이름만 바꾸어 참전했다 총 37개의 군대, 113개 사단이 인민지원군 자격으로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한다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인한 체제위협으로 인한 참전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낙동방어선까지 밀린 한국 국군은 미군을 중심으로 한 국제연합군이 참전하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며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 근처 중국 국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강계시를 임시 수도로 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 지원 요청을 하였는데 당시 신생 공산국가 였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자체가 미국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는 자유주의 국가가 건국되는 것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한국전쟁에 병력을 투입시키기로 결정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결정


중화인민공화국은 펑더화이(팽덕회)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결성하여 1950년 10월 19일부터 1차로 26만명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인민지원군의 최초 전투일은 10월 25일이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이 날을 중화인민지원군의 날로 개정했다



중화인민지원군의 실력


한국에서는 현재까지 인민지원군에 대한 실력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민지원군의 경우에는 수 십년 간 계속된 중일전쟁과 중국 내부의 국공내전에서의 수 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실력을 갖추고 있는 군대였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지원군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장진호 전투와 같은 전투 등이 있으며 국공내전에서 사용했던 매복전술과 인해전술을 사용하여 국제연합군을 격파시키며 평양 아래까지 남하 하였다 확실히 미군과 국제연합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전술이 약하고 실력이 부족한 한국의 국군을 주로 공격의 대상으로 전투를 진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1.4후퇴


중화인민지원군은 국제연합군과 미군, 한국군을 상대로 전선을 남쪽으로 남하시키기 시작했는데 1950년 12월 6일에는 평양을 함락시키고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재 점령(1.4후퇴)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중화인민지원군의 서울 점령은 실패라고 볼 수 있고 현재의 38도선에서 뺏고 뺏기는 전선을 구축하였으며 전선이 구축되자 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1952년에 중국 본토로 돌아갔다



휴전회담의 공산군측 대표로 참석


휴전협정 당시에 38도선을 기준으로 뺏고 뺏기는 전투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는데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인민군과 함께 공산진영측에 휴전협상국 자격으로 참석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 발표한 한국전쟁에 참전한 인민지원군 공식 사망자는 152,000명이며 국제연합군과 한국측에서 추정 사망자는 약 6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화인민지원군의 중국 본토로의 철수


1953년 7월 27일에 한국전쟁의 휴전이 성립된 후 인민지원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계속해서 주둔하고 있었으며 공동경비구역의 경비를 일부 맡거나 북한의 전 후 복구 사업을 도와줬으며 1958년 10월에는 완전히 중국 본토로 철수했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군대 파병은 중국의 체제확립에 대해 자유주의세력의 영향이 끼칠 우려에 대한 파병결정이라고 볼 수 있으며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를 한 지 몇 년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으로써는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갔던 것으로 판단 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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