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로 평가받는 '자유시 참변'
자유시 참변은 항일무장투쟁사에 독립군 최악의 흑역사이며 희생자 규모 역시 치명적이었으며 일제군과의 전투가 아닌 내분이라고 합니다. 자유시 참변은 당시 불완전했던 임시정부 내부를 분열 시키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사건이라는 점이라고 평가되고 있는데요. 자유시 참변으로 인하여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항일무장단체들이 오랫동안 통합한 연합 부대를 만들지 못하는 점에 있어서 최악의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자유시 참변 당시 시대적 상황
자유시 참변 당시 1차세계대전 중이었으며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의 말기 상황이었으며 러시아 제국은 일제와는 적대관계였지만 1차대전 이후로 동맹관계로 급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은 연해주 지방의 독립 단체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대한광복군은 1914년에 해체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1917년에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적백내전 기간에 돌입하였는데요. 연해주 또한 볼셰비키 적군(붉은부대)과 멘셰비키(백군)이 대립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멘셰비키(백군)가 러시아 적군과 동시에 한인 항일무장독립부대도 섬멸하려고 했는데요. 항일무장단체들은 러시아 적군측에 서서 멘셰비키(백군)과 대항했으며 볼셰비키 적군(붉은부대)의 세력이 커지자 자유시로 집결했다고 합니다.
대한독립군단의 창설 및 개편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격과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결국 한인무장대들은 일제군을 피해 북쪽인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독립군을 통합 및 재편성 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습니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이었고 부총재는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이었으며 총사령관에는 김규식 참모총장에는 이장녕이 추대 받았다고 합니다. 여단장에는 지청천, 중대장에는 김창완 등을 선임하여 대한독립군단 휘하에 1개 여단을 두었다고 하는데요. 그 아래에 3개 대대와 9개의 중대, 27개 소대를 평성했으며 총 병력은 3,500명였다고 합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들을 자유시에 집결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무장독립군의 자유시 집결의 궁극적인 목적은 분산했던 독립군 부대들의 힘을 모아 단일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는데요. 이들은 러시아 적군(붉은군대)를 도와 일본군을 몰아내고 만주 일대에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것이 의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소련 적군의 한인부대장인 박일리아의 도움으로 소련의 전술법을 교육하는 등 대한독립군단을 훈련 시켰다고 합니다.
고려공산당 내부 파벌 간의 독립군 통수권 갈등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독립군 통수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자유대대의 경우 고려공산당 중 러시아파가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항군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하자 분열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결국 러시아파와 상하이파 사이에서 분쟁이 표출 되었고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고려공산당 상하이파가 장악했다고 합니다. 이항군은 자유대대측과는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이항군대를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아래 집결한 모든 한인무장단체를 두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박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는데요. 결국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여 자유시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하였고 박일리아는 명령을 거부하고 계속 반항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박일리아 등은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에 자유시 수비대 29연대에게 투항을 하였고 29연대장은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자유시 수비대 29연대는 사할린 의용대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했지만 사할린 의용대는 무장해제에 대해 불응했는데요. 자유시 수비대 29연대는 사할린 의용대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려 강제적인 무장해제를 단행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수 많은 독립군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후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붉은군대(적군)으로 편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유시 참변에 대한 평가
한국 근대사 항일무장투쟁사에 있어서 이 사건을 한인간 최초의 동족상잔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 사건은 외부적으로는 러시아 붉은군대의 공격을 받아 일어난 참사였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고려공산당 내부의 러시아파 vs 상해파의 권력투쟁이 불러 일으킨 사건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자유시 참변 이후 무장독립군들에게 끼친 영향들
자유시 참변이라는 참변으로 인하여 대한독립군단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여기에 책임을 지고 두 달 뒤 밀산에서 자살했는데요. 또한 이범석, 김홍일 등 많은 독립군들은 만주에 잠복했었으며 김좌진만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탈출하여 만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에 사상적으로 끼친 영향은 엄청났으며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극도의 반공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김구 선생 등 반공주의를 고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이 김원봉, 여운형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대를 거부한 까닭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자유시 참변은 독립군 내부에서 일어난 최악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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