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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인해 저평가를 받게 된 비운의 명장

똥베이런 2018.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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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으로 본관은 평산 시호는 충장 북방의 여진족 토벌로 용맹을 떨쳤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직전에 신립 장군은 조선에서 이일과 더불어서 명장으로 추앙받던 인물이라고 하는데요. 하지만 임진왜란 초기 탄금대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역사속으로 사라진 조선의 명장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이전 신립


신립 장군은 1567년(선조 즉위년) 무과에 급제하고 난 뒤 조선 육군 소속으로 여러 무관직을 지냈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의 북쪽 변방에 침입해 온 여진족 니탕개를 격파하는 등 변방의 적을 소탕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1587년에는 왜구가 침입하자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에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왜구가 철수하여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것에 빌미잡혀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고 합니다.



탄핵 당했지만 여진족 토벌과 왜군 토벌로 인해 생긴 명성 덕분에 임진왜란 직전 조선에서는 이일과 함께 당대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기병을 다루는 지휘능력에 있어서는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관직에 파직되었지만 얼마가지 않아 등용되어 관직을 지냈으며 싸움 실력 하나는 당대 최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기록대로라면 고려에는 소드마스터 척준경, 고려말과 조선초기 이성계가 있었다면 조선 중기 선조시대에는 보우마스터 신립이 있었다고 할 정도인데요. 당연히 임진왜란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신립은 조선의 명장으로써 한국 역사에 길이 남았을 것입니다.



탄금대 전투


신립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특성상 기병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것 까지는 그런대로 잘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조총이라는 무시무시한 일본의 주력무기에 대해서는 예측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무엇보다도 자만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류성룡의 징비록의 기록을 보면 류성룡이 왜군의 조총에 대해 언급을 하였다고 합니다. 류성룡이 조총에 대해 걱정을 하자 신립이 조총이라는게 어디 쏘는대로 맞는답니까? 라며 거들먹거려 류성룡이 상당히 조선군의 패배를 걱정했다는 기록도 나온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신립은 충주로 출진하여 전투 지형을 보고 넓은 들판을 이용하여 기병으로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립은 늪지대가 있는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쳐서 전투를 벌였다가 왜군에게 패배했습니다.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패배하자 수십 명의 일본군을 죽이고 남한강으로 뛰어들어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임진왜란의 초기의 경과를 보면 기존 육지를 침략해오던 왜군과 같은 맥락으로 판단했다는 것인데요. 신립 장군은 일본 본토에서 넘어온 왜군이었다는 점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고 합니다. 


신립 장군에 대한 평가


조선왕족실록이라는 기록을 보면 신립 장군은 당시 조선의 보우마스터가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충주로 내려가기 이전에 한양 도성에 소문이 퍼져 대신들과 가솔들이 다 짐싸고 도망가려는 분위기였다고 하는데요. 그런 상황에서도 군대를 이끌고 전선에 나선 것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립장군이 크게 실수한 점은 일본 본토에서 넘어온 왜군을 기존 왜군과 니탕개의 난 때의 여진족으로 평가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 점인데요. 대부분의 역사전문가들은 신립 장군의 판단력과 분석력 그리고 오만함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가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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