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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일어난 배경과 원인에 대한 가설 3가지

똥베이런 2018.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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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대해서 과거에는 북한의 주장이었던 북침, 남한의 주장이었던 남침, 그리고 쌍방 책임론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는 평가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 중심의 시각으로는 군 병력과 경찰병력의 휴가일을 이용한 북한의 무력 도발행위이자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고 주장해오고 있습니다.


다음은 한국과 미국 등의 국가에서 과거에 제기되었던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여러가지 가설들과 주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탈린 의지로 인한 전쟁 주도설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주도한것이 아닌 스탈린의 의지로 전쟁이 발발되었다는 설입니다. 이 주장의 이유로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린다는 것이 목적이였다는 주장입니다. 특히 아시아 지역 전체를 공산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 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경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스탈린은 미국과의 갈등을 걱정하여 한국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50회 가량 한국전쟁을 발발시켜달라는 재가를 요구했고 스탈린은 지속적으로 거절했지만 결국 승인을 해주게 되었습니다.



한미 공모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입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집권 이후 여러차례 무력 북진통일을 주장하였습니다. 미국의 군사 원조를 지속적으로 요청한 바 있는데요.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으며 미국은 남측의 국군을 강화시키면서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는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인데 실제로 북한은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었다고 보고 있다고 합니다.



내란 확전


한국전쟁의 시작이 6월 25일이 아닌 그 이전의 작고 큰 전투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입니다. 1950년 이전부터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 십차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것이 확대되면서 한국전쟁으로 확대됬다는 주장입니다.


내란 확전설에 대한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1. 작은전쟁 ( ~ 1950년 6월 25일) :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 됨


2. 제한전쟁(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1일) : 북한이 대규모 무력 동원을 통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전격 침탈하여 불법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함


3. 전면전쟁(1950년 7월 1일 ~ 1950년 10월) :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대대규모의 미군 스미스부대가 참전, 북한은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령함


4. 확대전쟁(1950년 10월 ~ 1951년 6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UN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함. 이후 항복을 재차 권고했으나 대답이 없어,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 곧 유엔군도 진격 시작, 평양 수복,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이어졌고 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듬


5. 고착전쟁(1951년 6월) : 중국 인민지원군의 2차례에 걸친 춘계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에 공산 측이 정전협정을 받아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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