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중공군 3개사단을 박살낸 국군 6사단의 용문산전투

똥베이런 2017. 12. 22.
반응형

용문산 전투는 6.25 한국전쟁 당시 1951년 용문산과 화천 저수지 일대에서 한국군 제6보병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63군 187사단, 188사단, 189사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투를 말한다



용문산 전투 이전 상황


한국전쟁에서 수십만의 중공군이 참여하자 한국군과 UN군은 밀려서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중공군은 국군이 후퇴하는 것을 뒤쫓아 강력한 공격을 하게 되는데 중부전선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직면하게 된 부대가 당시 장도영이 사단장으로 지휘하던 한국군 6사단이었으며 한국군 6사단은 개전 초기에 춘천-홍천 전투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공을 인정받아 유명세를 떨친 사단이었으나 불과 한달 전에 중공군의 4월 공세에 사단 전체가 줄행랑을 치면서 패전했고 결국 미군 수뇌부부터 병사들까지 비웃음을 당하는 존재로 전락한 상태였다. 당시 미군 병사들은 한국군 6사단 마크를 단 장병이 지나가면 "겁쟁이 블루스타"라고 조롱하며 침을 뱉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군 6사단은 중공군의 진격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도망간 덕분에 장비는 왕창 잃었지만 병력 소모가 적어서 빠르게 재편성이 가능했다고 한다



중공군의 공격, 용문산 전투 한국군 6사단 전설의 시작


중공군이 공격을 가해오자 한국군 6사단의 방어선은 경기도 용인 일대에 있는 용문산이었는데 당시 6사단 사단장이었던 장도영은 북한강을 넘어오는 중공군을 염려해서 사단의 주 방어선보다 한참 앞에 있는 북한강 아래쪽으로 1개 연대를 보내 진지를 구축했고 6사단의 주 병력은 방어선보다 훨씬 위쪽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난 뒤 1951년 5월 18일에 중공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는데 작전상 후퇴를 해야했던 강 아래쪽으로 진지를 구축했던 2연대 1,2 대대가 저항진지에 틀어박혀서 중공군을 미친듯이 막아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공군과 인근 포병부대가 화력을 지원하면서 중공군을 막아냈고 중공군은 "이렇게 방어가 단단한 것을보니 한국군의 주 방어선이 여기가 틀림없다"라고 판단하여 예비 사단까지 총 3개 사단으로 공격을 했다 이후 지속되는 화력지원으로 인하여 중공군의 공격은 잠시동안 없었다



중공군이 공격을 잠시 쉬고있는 틈을 타서 용문산의 주 방어선에 대기하고 있던 6사단의 나머지 2개 연대(7연대, 19연대)가 총반격을 개시하였고 몇 일동안 2연대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중공군은 19연대가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자 자신들의 병력보다 훨씬 많은 병력의 대대적인 반격이라고 오판하였고 급기야 중공군은 전열이 완전히 와해되면서 3개 사단 병력이 2개 연대 병력에게 패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승세를 탄 한국군 6보병사단은 패주하는 중공군에 대한 맹렬한 추격을 개시했고 다시 북쪽의 북한강을 건너갈 여유도 없었던 중공군 3개 사단의 병력은 북한강 남쪽을 따라 양평에서 춘천을 거쳐 화천까지 70km ~ 80km를 쫓겨며 엄청난 손실을 입다가 결국 화천 저수지에서 궤멸하였다



한국군 제6보병사단의 승리 결과


용문산 전투에서 한국군 제6보병사단은 사살 확인만 17,000명이 넘었고 포로도 2,000명 정도를 잡는 큰 전과를 올렸으며 단일 전투로는 한국전쟁을 통틀어서 찾아보기 힘든 대승이며 현리 전투로 인하여 땅에 떨어진 국군의 명예를 어느정도 만회한 전투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중공군이 유일하게 한국군에게 패배했다고 인정한 전투라고 볼 수 있으며 지휘관의 냉철한 판단력, 부대의 기세, 예비대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전투라고 볼 수 있다.


<글쓴이 추천 글 링크>

국정을 주도한 최순실의 비선모임, 팔선녀

최순실 게이트, 현재 한국사회의 반응들

최순실 조카, 장유진에 대한 정보

베트남 전쟁 한국군의 전쟁범죄 논란 사례

북한이 한국을 이길수 없는 이유들


이 글이 재미있고 유익하셨다면 로그인이 필요없는

아래에 있는 <공감> 버튼 한 번 눌러주세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