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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으로부터 민족을 구한 조선의 영웅들

똥베이런 2016.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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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를 통일한 하시바 히데요시가 1952년에 명나라를 정복하겠다. 명나라로 갈 수 있게 조선이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를 거절한 조선을 침공한 왜란으로 한국에서는 이를 1592년 임진년에 일어난 왜란이라 하여 임진왜란이라고 부른다.



왜란으로부터 민족을 구한 조선의 영웅들



충무공 이순신 (전라좌수사, 삼도수군통제사)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성웅으로 묘사하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로 왜군과 맞서 싸웠으며 대체적으로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의 대표적인 전투는 한산도 대첩이지만 부산포해전으로 인해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이 남해안 영역의 해상장악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왜군들의 식량보급을 차단하는 결정적인 역활을 한 조선의 영웅이다.



충의공 정기룡 장군 (조선의 조자룡)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명나라 장수 마귀는 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을 조선에서 제일의 장수로 꼽았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정기룡 장군은 왜란 당시 나이가 30대의 젊은 장수였고 이괄의 난에 참여해 생을 마감했지만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기병 수십기로 왜군 500명을 격파하고 금산전투에서 포로가 된 우방어사 조경을 구한 것이 정기룡 장군의 유명한 일화이다.



권율 (광주목사, 도원수)


사실 권율 장군이 민족의 영웅이라는 것에 대해 상당히 문제점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란 당시에 한양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점령해 나가는 왜군이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해상을 장악해버리자 보급에 차질이 생겼고 이에 왜군은 전라도 지방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 때 권율 장군은 금산전투와 이치고개 전투에서 일본군을 막은 맹장이다. 물론 호남의 의병들이 왜군의 후미를 공격해서 왜군이 후퇴를 했긴 했지만 행주산성 전투와 금산전투에서 중요한 역활을 했기 때문이다.



김시민 (진주목사)


왜란 당시에 진주성은 경상도 지역에서 전라도 지역으로 넘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김시민 장군이 왜군을 막았다고는 볼 수 없고 조선의 백성들과 함께 힘을 합쳐 막은 것에 대해 의미를 두고 있다.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백성들이 김시민 장군의 지휘에 잘 따라줬으며 의병장들과의 관계를 꾸준히 하여 의병들이 진주성을 공격하는 왜군을 게릴라 형식의 전투를 펼쳤으며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김시민 장군의 지휘능력을 높히 평가하여 민족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억기 (전라우수사)


사실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은 주목받지 못한 장수인데 이억기 장군이 이끌고 있는 전라우수군이 한산도 일대에서 벌어진 수전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조선수군은 대승을 거둘 수가 없었다. 실제로 이억기 장군이 이끄는 전라우수군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전라좌수군과 연합하여 많은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애 류성룡 (도제찰사, 영의정)


한국인들이 알고 있듯이 서애 류성룡은 실제 야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야전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왜란 당시 전시재상으로 전란 속에서 나라를 구한 조선의 명재상입니다. 특히 징비록이라는 기록서를 남겼으며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류성룡 조선을 구한 영웅이라는 이유는 딱 두가지인데 첫번째로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에 있어서 변호했다는 점, 두번째로는 실제 임진왜란에서 조선군 지휘화 수습에 많은 공을 세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조선의 훈련도감은 류성룡 선생이 설치했다고 알려져 있다.



곽재우 (영남일대 의병장)


흔히 임진왜란의 최초의 의병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곽재우 장군은 홍의장군으로 유명하다. 곽재우 장군은 경상도 의령에 있는 세간리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며 흔히 말해서 양반집 자제라는 것이다. 왜란이 터지자 의병을 모아 활동했으며 곽재우 장군의 유명한 전투로는 정암진 전투가 있으나 실제로 왜란 당시에 조선 정규군을 상당히 많이 지원한 것으로 한국의 정사기록서에 기록되어 있다.



고경명 (호남일대 의병장)


고경명 장군은 원래 조선에서 관직을 하던 인물인데 왜란이 터지자 30일만에 6,700명의 의병을 모았고 보급 문제로 금산을 넘으려고 했던 일본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일본군의 호남진격을 저지한 바 있다. 실제로 고경명 장군이 순절한 이후에는 호남 일대에서 1,000명 이상의 의병을 모으지는 못했다고 한다. 물론 자의만으로 금산성으로 돌진한 것은 의기를 떠나서 군사적 역량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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