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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이 일본에 의해 재판을 받았던 이유

똥베이런 2018.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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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는 20세기 일본의 총리로 한일합방을 추진한 인물로 20세기 초반 일본을 세계 열강 중 하나로 성장시킨 인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한민족의 영웅 '안중근'의사에 의해 처단 당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의사가 일본에 의해 재판을 받은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은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령 하얼빈 역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처단 당시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고 당시 역의 치안을 담당하던 부대는 '러시아 제국군'이었다고 하는데요. 1909년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영향력은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후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제국군이 일본측으로 인계하면서 '안중근 의사'는 중국 대련에 있는 뤼순 감옥에 수감되게 되는데요.



사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 역'은 국제법 상 러시아 제국의 실효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1차세계대전 연합국 소속의 승전국으로 러시아는 일본에 '안중근 의사'를 인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후 '안중근 의사'가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는다는 소속을 듣고 스페인, 영국, 인도 등 유능한 국제변호사들이 '안중근'의사를 변호하고자 몰려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는 국제변호사들이 제출한 선임계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데요.



결국 '안중근 의사'는 일제가 형식적으로 붙인 국선 변호사가 '안중근 의사'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안중근 의사는 국제법 상 러시아에서 재판을 받아야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러시아는 그러지 못했는데요. 만약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에서 재판을 받았다면 일제에 해방 된 조국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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