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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북핵위기 당시 미국이 북한을 선제타격하지 않은 이유

똥베이런 2018.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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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 무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94년 1차 북한 핵 실험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약 20년이 지난 지금 북한의 핵 무기는 7차 핵실험을 앞두고 있으며 북한의 핵 무기 보유는 현실화가 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1994년 북핵위기 당시에 북한 선제타격을 없었던 일로 한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북한은 핵 확산방지조약(NPT)를 탈퇴하면서 핵 보유에 대한 욕망을 본격적으로 세계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1994년에 북한이 1차로 핵 실험을 하자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 영변 핵 시설에 대한 정밀 폭격을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1994년 1차 북핵위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 선제타격에 대해 강력한 반대로 인해 선제타격이 무산되었다는 설이 나온적도 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이야기라고 합니다. 1994년 당시 대통령비서실 통일안보 비서관이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은 선제타격에 찬성했다고 합니다.



또한 국가비상회의를 포함하여 미국이 선제타격을 감행하게 될 경우 한반도에 오는 피해를 추산을 해보니 엄청난 피해가 나왔다고 합니다.



1994년 당시까지만 해도 남한과 북한의 경제적 차이는 많이 났지만 군사적으로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미국의 선제타격은 한반도에 엄청난 재앙을 가지고 온다는 결과를 알고 있었던 것이죠. 즉, 미국은 선제타격만 하면 끝이지만 실질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들이었으니까요.



결국 1994년 북핵위기로 인해 북한과 미국의 사이가 악화되자 미 클린턴 행정부는 지미 카터를 평양에 특사로 파견했습니다. 지미 카터의 북한 방문은 비밀 회담으로 진행되었으며 미국의 선제타격 계획은 없던 일로 하고 화해모드로 간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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